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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성곡도서관소개 > 성곡선생소개 > 일대기

성곡선생 소개introduce

성곡 김성곤(1913 ~ 1975년) 철저한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성곡선생, 특히 인재양성이 나라의 부강과 발전을 위한 최고의 투자임을 강조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신 진정한 교육가였습니다.

청소년기의 성곡선생
달성 보통학교시절(오른쪽), 대구고보 시절(왼쪽)
1913년 7월 14일 (양력 8월 15일) 경북 달성군 현풍면 하동 85번지에서
아버지 김광도와 어머니 김봉옥의 슬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다.
1921년 (9세) 7월 부친별세
1922년 (10세) 4월 현풍 보통학교 입학
1925년 (13세) 4월 대구로 이사. 대구 달성보통학교 4학년 편입
1928년 (16세) 4월 서울 휘문고보 입학
1929년 (17세) 4월 대구고보 2학년 편입
1931년 (19세) 11월 항일운동으로 대구고보 퇴학
1932년 (20세) 4월 서울 보성고보 4학년 편입
1934년 (22세) 4월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상과 입학
1937년 (25세) 3월 보성전문 졸업. 김미희 여사와 결혼. 대구부청(대구시청) 근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성곡 선생은
학창 시절 학업과 함께 유도와 축구 선수로 활동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특히 대구고보 재학 중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으로 퇴학을 당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고 민족정신을 키워나갔다.

성곡선생의 민족정신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 - 1955년) 선생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인촌 선생의 감화를 받으면서 더욱 성숙해졌다.
김미희여사와 결혼사진
"민족이 무엇이며, 민족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도 인촌의 무언(無言) 실천정신에서 배울 수 가 있었다.
그래서 성곡은 자신의 인생 형성과정에서 결정적 영향을 준 분이 인촌이었으며 인촌의 육영사업, 언론사업, 민족기업 등을 흠모하였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보성전문 시절은 성곡의 민족주의 이념이 확고한 신념으로 성숙되어 간 시절이었다."
- [별일 없제 - 성곡 김성곤선생 일화집] (속편;1988년)에서 -
<대구고보 4학년 시절 축구부 졸업생 송별기념 (앞줄 맨 왼쪽)>/<보성고보 축구팀 (뒷줄 오른쪽에서 5번째>/<보성전문학교 시절 (왼쪽에서 7번째)>
“성곡은 생전에 깊이 존경하며 본을 받으려는 분이 한 사람 있었다. 다름 아닌 인촌 김성수 선생의 일생이다.
기업, 언론, 교육 이 세 가지야 말로 후세에 남길 굳건한 인생의 보람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인촌 선생은 삼양사라는 기업을 밑받침으로 고려중앙학원이라는 교육사업과 동아일보사라는 언론 사업을 이 세상에 자라게 했다.
성곡은 애써 이러한 경영법을 본보고 실천하려고 했다. 쌍용이라는 큰 기업과 국민대학이라는 교육사업, 동양통신과 대구문화방송이라는 언론 사업을 펼쳐낸 것이다.”
- [별일 없제 - 성곡 김성곤선생 일화집] (1985년)에서-

언론인, 정치인의 길
<제6대 국회의원에 출마, 선거유세를 하고 있는 성곡선생(1963.11)>
1945년(33세) 10월 영남일보 창간에 참여
1951년(39세) 4월 대한통신(UPI계약) 취제역 취임
1952년(40세) 4월 동양통신사 창간
1953년(41세) 11월 동양통신사 사장 취임
1954년(42세) 3월 연합신문 인수
6월 연합신문 발행인 겸 사장
1958년(46세) 5월 제 4대 국회의원 당선(경북 달성)
1961년(49세) 2월 IPI(국제신문인협회) 정회원으로 가입
1963년(51세) 11월 제 6대 국회의원 당선(경북 달성․고령)
1965년(53세) 9월 재단법인 성곡언론문화재단 설립
12월 공화당 재정위원장 및 당무위원 선임
1967년(55세) 6월 제 7대 국회의원 당선(경북 달성․고령)
1969년(57세) 6월 IPI 총회(캐나다, 오타와), IPI 집행부 이사 선임(한국인 최초 본부이사)
1971년(59세) 10월 대구문화방송 인수, 국회의원직 사임 및 공화당 탈당
1973년(61세) 4월 동양통신사 회장 취임


전쟁 후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한 성곡 선생은 동양통신사를 설립하고,
연합신문과 대구문화방송을 인수하는 등 언론기관의 육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IPI(국제언론인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 언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성곡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언론인의 해외연수 등 언론인의 자질 향상 및 국제화에 기여하였다.



"성곡은 언론기업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언론 전체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중 두드러진 것은 「국제신문인협회」(IPI)에서의 활약과
1964년 이른바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때의 조정 노력, 그리고 성곡언론문화재단의 설립을 지적할 수 있다."
- [별일 없제 - 성곡 김성곤선생 일화집](속편;1988년)에서 -
<제8차 IPI 총회에 참석 후 귀국하는 성곡 (1959.6.5)>
<호브라이트 UPI 부사장을 맞아 남대문로 동양통신사 정문앞에서 (1960.3)>/<재단법인 성곡언론문화재단 설립 이사회를 마치고 (1965.9.13)>
별일없제
해방과 국가재건, 경제개발이라는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다방면에서 활약한 성곡 선생은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과 함께 말없이 사람을 챙기며 정을 아끼지 않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시멘트 사업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을 만들었음에도 비가 새는 집에서 살았고, 헤진 양복으로 동분서주하며 '별일없제?'라는 말로 사람 챙기기를 가족같이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성곡 선생의 소박한 생활과 후덕한 인심은 오직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일하고 또 일하겠다는그의 신념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